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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메아리/구민투고

4월 독자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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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3주 동안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났다. 왜 튀르키예였는지는 모르겠다. ‘형제의 나라’니까, 한국인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살갑게 대해주는 곳이니까 그랬을까? 현지에 도착해서 안 사실이지만, 사실 튀르키예에게 ‘형제의 나라’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훨씬 옛날부터 그랬고, 튀르키예와 가까운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 거의 전부가 형제의 나라라 불리고 있었다.

 

내가 묵은 호텔 주인은 나를 “형제의 나라에서 왔네요!”라며 환영했는데, 그 뒤로 오는 모든 방문객 에게도 같은 인사를 건넸다. 여행하는 동안 환상은 점점 깨졌다. 튀르키예인들은 ‘형제의 나라’가 너무 많아서 그중 한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특별히 살갑게 대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택시 기사들은 요금의 두 배를 아무렇지 않게 올려받았고, 노점 주인들도 현지인들보다 두세 배 비싼 가격의 음료를 팔았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파묵칼레, 페티예, 으스파르타를 거쳐 동남부 도시 가지안테프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미 수많은 호객꾼에게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랜 여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나는 거의 프랜차이즈 케밥집에서 식사를 했다. 그렇게 가지안테프에 머무른 지 사흘째였을까, 케밥집 주인장이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안절부절못한 채 눈치를 살피던 그가 마침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잘 지내나요?” 구글 번역기 음성이 들려왔다. 짧다면 짧은 여행이었지만 너무도 그리웠던 한국어였다. 사장님은 매 끼니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로 케밥을 먹으러 오는 동양인에게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마음이 울렁거렸고, 굳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튀르키예에게 ‘형제의 나라’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뒤로 조금 삐져 있었다. 한국인은 튀르키예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흔하디흔한 관광객 중 일부고, 그렇기에 다른 관광객들처럼 사기도 당하고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형제가 많다고 해서 형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튀르키예인들은 무심해 보이지만 관광객들에게 애정을 갖고 도와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택시 기사가 말도 안 되는 요금을 요구했을 때도 말리는 현지인이 있었고, 노점 주인이 현지인과 다른 가격을 불렀을 때도 자신이 대신 내주겠다며 돕는 사람이 있었다. 케밥집 주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역시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예요!” 그가 환하게 웃었다. 생각을 바꾸자 튀르키예인들이 정말 형제처럼 친근해졌다. 그들의 도움도 받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즐겁게 남은 여행을 마쳤다.

 

다시 효성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평소 데면데면하던 이웃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사소한 안부를 물었다. 무뚝뚝해 보이던 이웃들도 내 행동에 경계심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 형제가 많다고 해서 형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웃이 많다고 해서 이웃이 아닌 게 아니듯이. 아파트는 이웃이 많아 서로 무심한 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늘도 튀르키예에서 배운 것을 되새긴다. 우리는 모두 형제고, 이웃이다. 인구가 늘어도 서로에게 살가운 계양구가 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친다.


쌀쌀한 바람

오늘도 불어오지만

다가서는 봄은 막을수 없네요.

 

이미 봄은

내 가슴으로

다가 왔으니까요.

 

 

잔설이 귀퉁이에

남아 있어도

이미 봄을 속일수 없네요.

 

그 밑에선

새록새록 봄의 향연이

이미 고개 내밀어

시작 됐으니까요.

 

 

먼산 설경이

제아무리 발버둥 친다해도

이내 연분홍에 묻히겠지요.

 

남녁을 떠난

봄바람

춘풍님이

 

아지랭이길 따라서

여기에 와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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