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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메아리/구민투고

5월 독자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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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버지 속옷을 삶을 때면 뭘 저리 극성스럽게 할까 생각했었다. 엄만 아버지의 팬티, 메리야스가 그냥 흰색이어선 안 되는 것 같았다. 유해가스 따윈 안중에도 없이 하이타이에 옥시크린, 락스까지 섞은 물에 아버지 속옷을 넣고는 맨손으로 몇 시간이고 몇 번이고 뒤적이며 푹 절였다가 폭폭 삶아 푸른 하늘 아래 내다 널었다. 파란 하늘빛 많이 머금으라고 꼭 한낮에 널어 쨍쨍한 열기 살아있을 때 거둬들이셨던 그 속옷은 늘 잘 벼린 푸른빛이 감돌았고 아버진 그런 속옷이 아닌 건 있을 수 없는 양 사셨다.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이후 아버지의 속옷은 모두 유색으로 바뀌었다. 함께 살 며느리에게 팬티를 내놓을 수 없는 시아버지가 손쉽게 세탁할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속옷들을 사면서 그제야 알았다. 엄마의 유난한 흰색 사랑은 엄마가 아버지에게 준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고 아버진 엄마에게 받은 최고의 자존감이었다는 것을. 이게 내가 흰색을 좋아하는 이유다.


스무살 적엔 내 나이 오십이란 없었다.

진달래마냥 설레던 그때 유행가처럼

잿빛 하늘과 소주 한 잔이 좋았다.

쏟아지는 빗속을 내달려도 좋았다.

치열해서 좋았지, 곧은 어깨를 잔뜩 웅크려도 반짝거렸지.

봄 길 파릇한 연인, 내려다보던 벚꽃나무는

아직도 수줍은 손 내밀고 있을까.

내 나이 오십에는 연분홍 스무살도 있건만

꽃길 걷는 어깨너머 내 그림자 된

반백의 사내가 무심히 웃고 있네.

나의 첫사랑 청년이여.


길고 긴 겨울 동안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너는

얼어버리지도 않고 날아가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참고 견디면서 기다리다가

따뜻한 봄바람 타고 살포시 피어나더니

어느새 열매를 맺고 무럭무럭 자라나

탐스러운 배가 풍년을 이루었네

이제 다시 찬바람 불어오면

너는 또 자취를 감추고 꼭꼭 숨었다가

또다시 남풍 타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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